한 시각장애인 소년 이야기

까만 염색머리 때문인지 50대 초반이 되도록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 받아 본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지난 5월 중순,
나에게 뜻하지 않은 작은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그날은 오래 걸리는 퇴근길에 읽을 겸 지하철 역 매점에서 잡지
한 권을 사 들고 전동차에 올랐다. 언제나처럼 많은 사람들로 비집고
가까스로 안쪽으로 들어가 한 청년 앞에 섰다. 대학생 같아 보이는
그 청년은 피곤한지 졸고 있었다. 두 역 정도 지나 다음 정차역 안내
방송이 나오자 졸고 있던 청년이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속으로 '이 친구 안내방송 아니면 한없이 자겠구먼' 하며 무의식적으로
청년이 일어난 자리에 앉아 다시 책 읽는데 열중했다. 그렇게 책 속에
빠져 얼마를 갔을까 무심코 책에서 잠깐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아까 그 청년이 내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걸 어쩌나. 내게 자리를 양보해 준 것 같은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당연한 듯 앉고 말았으니. 이 청년 섭섭하기도 했겠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앉아 있는 것이 모샌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얼마간 머뭇거리다가 결국 말문을 열었다.

"이봐 학생, 멀리 가는 거야? 내가 서서 가도 되는데…." 고맙다는 말 대신
어색한 한마디를 건네자 그 청년은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말을 받는다.
"죄송합니다. 아까는 제가 깜빡 조는 바람에 얼른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생각지 못했던 그 청년의 대답은 하나의 작은 폭풍을 만들며 금세
가슴속을 뜨겁게 했다.
'아, 오늘 내가 이처럼 아름다운 청년을 만났구나!' 엷은 미소와 함께
목례까지 하고 전동차에서 내리는 젊은이의 싱그러운 모습은 점차
사라져가는 참된 양보의 미덕을 새삼 느끼게 했다.

여러 날이 지난 지금에도 잔잔한 여운으로 남아 있는 그 날
그 조그마한 감동은, 평생 내 가슴속에 깊이 자리할 것이다.

고영달 님 / 서울 관악구 남현동